"석(石)으로 금을 대신하면 영원히 보존할 수 있다." 조상들은 문자를 금, 석에 새겼는데, 최초의 목적은 모두 문자에 담긴 내용이 오랫동안 보존되어 전해지기 위해서였다. 석재는 재질이 견고하고, 뚫기가 편리하며, 폭이 넓고, 새기기 쉽고, 위치가 유연하며, 보존하기 편리하다는 등 많은 장점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점차 청동 명문의 역사적 지위를 대체하였다.
○ 석고문(石鼓文)
석각 문자는 상나라의 석경(石磬)과 옥기(玉器)에 가장 먼저 보인다. 춘추전국시대에는 ≪석고문(石鼓文)≫을 대표로 하는 소량의 각석작품의 편폭이 크게 증가했다. 석고문은 석각의 시조로 불리며, 열 개의 북 모양 화강암 석단에 새겨져 있기 때문에 "석고문"이라고 불린다. 각 석고(石鼓)에는 사언시(四言詩) 한 편이 새겨져 있으며, 진공(秦公)의 유렵 내용을 기술하였다. 이는 대전(大篆)에서 소전(小篆)으로 변화하는 비정형의 과도적 서체이다. 이러한 석고문은 주진(周秦) 역사, 금석학(金石學), 문자학, 문학사와 서예사 연구에 있어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 등자사비(等慈寺碑)
≪등자사비≫의 전칭은 ≪대당황제등자사지비(大唐皇帝等慈寺之碑)≫로 당대 안사고(顔師古)가 작성한 것으로 전해지며, 지금으로부터 이미 1300여 년의 역사를 가지고 있다. 비문은 진왕(秦王) 이세민(李世民)이 수천 명의 정병만으로 두건덕(竇建德)의 십만 대군을 대파한 호로관 전투(虎牢之戰)와 사찰을 짓고 비를 세운 이유를 기록한 것으로 중요한 사료적 가치를 지니고 있다. 비문의 배치와 장법(章法)은 행렬이 분명하고 넓고 청명하다. 당대 저명한 서예가인 구양중석(歐陽中石)은 이 비를 학습한 후 위비(魏碑)나 성숙한 당해(唐楷)를 배우는 것이 매우 편리할 것이라고 했다.